대한민국 최대 미군 기지촌이었던 파주읍 용주골 살리기 ‘연다라 풍년’ 골목 축제가 30일 열렸다. 옛 문화극장에 파주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그 자리에서 열린 행사 개회식에 정치인들이 함께 했다. 행사장 앞줄에는 민주당 이혜정, 최유각 파주시의원과 박정 국회의원, 김경일 파주시장, 파주시의회 이성철 의장, 주민협의체 연풍다움 성경용 위원장이 앉았고, 뒷줄에는 국민의힘 안명규 경기도의원, 오창식, 최창호 파주시의원, 그리고 그다음 줄에 이익선 파주시의원이 자리했다. 민주당 김경일 파주시장과 박정 국회의원에 이어 최근 의장직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파주시의회 이성철 의장이 축사를 했다. 앞줄에 김경일 시장과 성경용 위원장, 그리고 뒷줄에 안명규 경기도의원과 최창호, 오창식, 이익선 파주시의원과 파주문화원 우관제 원장 등 참석자들이 축사를 마친 이성철 의장에게 박수를 보냈다. 사진 앞줄에 가장 크게 나온 사람들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최종환 파주시장이 30일 퇴임했다. 공직사회는 노래 ‘상록수’와 ‘꽃보다 아름다워’를 불렀다. 최 시장은 끝까지 가족을 지켰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버리고 아내를 선택했다. 최 시장은 아내가 스스로 인터뷰한 45분짜리 영상이 공개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아내를 위해서였다. 이 영상은 가정폭력에 휘말린 최 시장에게는 아주 유리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컷오프의 길을 갔다. 최 시장은 퇴임 후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유튜버 방송도 하고 파주 정치사를 주제로 책도 내겠다고 했다. 최 시장은 문산 장산리와 탄현 대동리 농지 중 대동리를 생각하고 있다. 농지 면적은 1,000평이다. 밭고랑을 일굴 소형 포크레인 면허도 따겠다고 한다. 탄현면 대동리 농지에 서면 임진강과 그 건너 북쪽 마을이 보인다. 최종환 시장의 ‘한반도 평화수도 파주’와 바로 마주하는 곳이다. 밭고랑의 길이가 궁금해진다.
“운정역 사진을 여기(동사무소)에 걸면 난리가 납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하 주민들이 교하 이름을 빼앗아 간 운정에 대해 잔뜩 화가 나 있는데 거기다가 운정역 사진까지 이렇게 전시하면 그냥 안 있을 겁니다. 다른 사진은 없나요? 교하 면사무소 사진이나 뭐 이런 거…” 교하동장의 말이다. 현장사진연구소(이하 현사연)가 교하의 사라진 옛 모습을 차례로 보여주는 ‘오늘의 사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최종환 파주시장의 역점 사업인 ‘마을살리기’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비용은 모두 현사연이 부담하는 문화예술 재능기부이다. 경의선 운정역은 간이역이었다. 기차 통학을 한 세대는 대부분 곡산과 백마역을 기억할 것이다. 통기타를 치며 술 한잔 걸쳤던 주점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당시 곡산역과 백마역은 고양군에 속했다. 기차가 파주에 들어서며 첫 번째 만나는 역이 운정역이다. 기차가 공릉천 ‘칠간다리’를 건널 때면 덜컹덜컹 소리에 잠을 깨고는 했다. 기차표를 확인하는 검표원도 없었던 간이정거장 운정역은 이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운정역은 운정신도시 개발 이전에 교하면에 속했다. 교하면은 삼국시대 ‘천정구현’이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 교하군으로 개칭됐을 정도로 역사 깊은 지역
400년 역사를 가진 마을 오현리가 군사훈련장이 됐다. 무려 1,000만 평의 ‘무건리 훈련장’이다. 이로 인해 동도라지, 양가터, 오리동, 샘골의 자연마을 오현1리와 수레너미, 멀원이, 부작골 등 오현2리를 합한 133가구 660여 주민이 쫓겨났다. 초리골 길목에 있는 법원도서관에서 양주시 쪽으로 가다 보면 긴 고개가 나온다. 사람들은 이 고개를 ‘스르레미’라고 불렀다. 수레가 넘어 다녔다는 뜻으로 전해진다. 수레너미 꼭대기에 다다르면 오현리 삼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오현1리, 오른쪽은 오현2리다. 그렇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도 직천삼거리에서 다시 만난다. 눈이 살짝 내린 10일 아침 오현리를 다시 찾았다. 곳곳에 훈련장이 들어서 마을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조선시대 기와를 굽던 곳이어서 ‘와야동’으로 불렸다가 질이 좀 떨어지는 흙으로 막사발(머런이)을 만든 곳이라 하여 붙여진 멀원이 마을 입구에 딱 한 집이 남아 굴뚝 연기를 내뿜고 있다. 젖소 목장을 하는 남경래 씨 집이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놓고 황톳빛 마당 한쪽에 앉아 부지깽이로 콩을 털던 남 씨의 어머니는 “젖소를 버리고 갈 수 없어 이렇게 버티고 있다. 내년 봄이면 파평산 기슭에 마련한
파주의 한 지역신문이 창간 30년을 자축했다. 이 신문은 창간호 1면을 장식했던 사진 한 장을 여전히 창간 정신으로 삼고 있다. 아주 흐뭇한 일이다. 또 다른 지역신문 발행인도 오는 9월 기자생활 30년을 뒤돌아보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도움을 준 시민 1,000명의 얼굴을 현수막에 담아 행사장에 걸겠다고 한다. 이 또한 축하할 일이다. 얼마 전 파주의 한 단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여직원은 다짜고짜 은행 계좌를 알려달라고 했다. 이유를 물었다. “그동안 우리 회의소를 잘 써주셔서 홍보비를 좀 보내려고 하는데요.”라고 했다. 광고가 아니면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지역신문 운영이 참 어렵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30년 전에도 그랬다. 그런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정론을 지향한다. 그 힘은 바로 창간 초심을 기억하는 데 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한 지역신문의 창간호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은 매우 인상적이다. 창간호 사진의 주인공은 월롱면 영태리의 서당 선생님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인 일곱 살 때 형을 따라 이 서당을 1년 남짓 다닌 기억이 있다. 그때 서당에서 먹었던 감자와 옥수수 맛은 최고였다. 나는 심언모 선생님을 훈장
청소년 백신 접종 이틀째인 20일 아침 금촌 시민회관에 마련된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에 대왕 구루프를 머리에 이고 등장한 여학생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2층 보호자석에 앉아 있던 어른들이 웃음 반, 걱정 반이다. 구루프 소녀는 주변의 시선과는 달리 여유만만이다. 친구들로 보이는 학생들도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다. 오히려 대왕 구루프는 긴장감이 배어 있는 예방접종센터에 웃음과 활력을 선사했다. 대왕 구루프는 문산고에서 왔다고 했다. 이날 파주시 고3 학생과 교직원 접종자는 총 1,084명으로 금촌센터(문산고, 금촌고)에서 584명, 운정센터(동패고)에서 500명이 접종했다. 그리고 50세 미만 교차 접종과 자율접종 등을 포함하면 총 1,604명이 접종한 것으로 집계됐다.
코로나19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파주시 보건소는 언제, 어디서, 왜 생겨난 것일까. 미국과 한국 정부의 공식 문서에 따르면 기지촌을 위안소,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을 위안부로 지칭했는데, 이 과정에서 전염된 성병을 관리하기 위해 긴급히 만들어진 파주보건소의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한국 정부가 미군 상대 성판매 여성을 지칭한 공식 용어는 ‘위안부’였다. 1951년 10월 10일 보건부가 자치단체에 보낸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지시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에는 유엔군 전용 위안소의 설치와 위안부의 허가, 등록, 검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공문 형식의 이 문서에는 또 ‘유엔군이 일반 여성을 유린할 가능성’이 있을 때 ‘위안소’를 설치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위안부’는 ‘접객부’, ‘땐사’와 함께 다양한 서류를 준비해 정부에 허가를 신청해야 했고, 정기적으로 성병검진을 받아 보건증에 검진 확인 도장이 찍힌 허가증을 휴대해야 했다. 성병 검진 주기는 접객부가 2주 1회, 땐사 1주 1회, 위안부 1주 2회로 위안부의 검진 빈도가 가장 높았다. 파주군보건소는 1963년 1월 아동면사무소(금촌읍사무소, 현재는 호텔) 창고로 지어진 1층 건물
파주바른신문이 민주화운동 사진전에 이어 ‘한반도 평화수도 파주’를 노래하는 ‘금강산 이야기’ 사진편을 연재합니다. 현장사진연구소와 공동으로 연재할 ‘금강산 이야기’에서는 이용남 사진가가 14차례 금강산을 오가며 찍은 금강산의 사계와 남북대학생상봉모임, 남북한교사대회, 남북대학생 새터, 장기수 선생 금강산 소풍 등을 사진으로 선보일 계획입니다. 이에 따라 ‘금강산 이야기 사진전’ 배경에 들어갈 평화의 노래를 공모합니다. 노래 주제는 자유이지만 가능한 평화를 염원하는 내용이 담기면 좋겠습니다. 반주없이 직접 부른 노래의 녹음 파일과 간단한 자기 소개글을 메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채택된 노래에는 한 곡당 10만 원의 원고료가 지급되며, 총 다섯 곡을 선정할 예정입니다. 보내실 곳은 site1988@naver.com 접수기간은 2021년 7월 17일 오후 5시까지입니다.
시민회관 대공연장에 설치된 ‘파주시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 2층 보호자석에서 중절모 차림의 두 어르신이 아래층 접종센터를 내려다보며 연신 누군가를 찾고 있다. 어르신 목에는 ‘보호자’라고 쓰인 목걸이가 걸려 있다. 취재진이 두 달 넘게 접종센터에 상주하며 75세 이상 어르신의 화이자 접종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해 왔지만 어르신이 직접 보호자 목걸이를 하고 2층에 올라온 것은 처음 보는 일이다, 두 어르신은 탄현면 성동리에서 오셨다고 한다. 며칠 전 2차 접종을 마쳐 마음이 가벼운데, 할머니가 주사를 안 맞겠다고 버텨 가까스로 설득해 오늘 함께 나오게 됐다고 한다. 존함을 물으니 “나? 보호자야.”라며 웃으신다. 코로나19 사진집을 발간할 계획인데 두 어르신의 모습을 찍고 싶다고 하니, 어르신은 흔쾌히 승낙하며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고 보호자 목걸이를 들어 포즈까지 취하신다.. 조끼 차림이 1934년생 신갑철 어르신이고, 흰색 차림의 박창득 어르신은 1937년생이시다.
지방자치가 부활한 지 올해로 꼭 30년이다.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1949년 제정되었고, 1952년 시도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지방의회가 강제 해산됐다. 그렇게 중단됐던 지방자치는 1991년 지방의회 의원선거와 함께 부활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장은 1995년까지 임명제가 유지되다가 1995년 6월 27일 지방의회 의원과 단체장을 뽑는 동시선거가 실시되면서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가 열렸다. 파주시의회는 1991년 3월 26일 파주군의원 선거와 함께 파주군청 건물에서 출범했다.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의 민원을 발로 뛰어다니며 해결하는 등 나름의 책임감과 봉사 정신을 발휘했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는 과정에서 몇몇 의원들은 땅과 소를 팔아 의정활동비에 충당하기도 했다. 의장을 역임한 어떤 의원은 경조사비로 소 10마리를 팔았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러하니, 기초의회 의원에 당선되는 것이 무조건 반길 일은 아니었다. 무보수 명예직이 유급으로 바뀐 것은 2006년이다. 이제 의원들은 경조사비를 안 내도 되고, 세비로 연봉 3,600만 원을 받기도 한다. 게다가 업무추진비로 의장은 3,68
"아침 햇빛 찬란한 장명산 기슭…” 1907년 개교한 교하초등학교 교가 첫 구절에 장명산이 나온다. 그리고 교하중학교 교가에도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장명산맥 기슭일세”라는 구절이 있다. 장명산은 백두대간의 추가령에서 갈라져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민족정기가 서려 있는 한북정맥의 줄기다. 그런 장명산이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 일제가 단지 석회 생산만을 위해 장명산을 파헤쳤을까? 횟가마골은 장명산을 중심으로 왼쪽이 ‘벌언리 횟가마골’ 오른쪽이 ‘능거리 횟가마골’로 불렸다. 이 지역 앞을 흐르는 강을 ‘횟강’이라고 했는데 ‘하지석리’와 교하다리 사이를 ‘교하강’, 하류 쪽은 ‘방천’‘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모두 ‘공릉천’으로 부르고 있지만 낚시꾼들은 대부분 ’횟강‘으로 기억한다. 횟강에는 나룻배가 있었다. 이 나룻배는 1981년 곡릉천교가 놓이기 전까지 가루개(탄현 갈현리) 들녘에서 생산되는 벼와 농산물 등을 오도리와 하지석리로 실어날랐다. 횟강에는 매년 사람들이 빠져 죽었다. 그럴 때면 시신을 찾기 위해 여러 곳에서 수영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래도 시신을 찾지 못하면 어릴 때부터 횟강에서 물놀이를 했던 횟가마골 아이들이 불
횟가마골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2월 ‘조선중요광산물증산령’ 실시에 따라 교하면 오도리 장명산에 석회 생산 노동자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불리게 된 이름이다. 횟가마골 사람들은 대부분 북쪽에 고향을 둔 피란민이거나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지식인들도 꽤 있었지만 이 사람들은 횟가마골을 자신들의 인생 마지막 종착역으로 여기기도 했다. 장명광산은 산밑에 일자형 사택을 나란히 지어 노동자들에게 제공했다. 처음 광산에 들어오는 노동자 대부분은 이 사택에서 살다가 임대 기간이 끝나면 땅을 빌려 움막집을 짓거나 사택과 엇비슷하게 생긴 개인 집을 마련해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는데 그런 가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횟가마골에는 구멍가게가 네 군데 있었다. 가끔 공릉천 낚시 손님을 상대하기도 했지만 거의 노동자들이 이용했다. 장명광산은 한 달에 두 번 급료를 지불했다. 사람들은 이를 ‘간조’라고 불렀다. ‘간조’ 날이 되면 구멍가게는 외상값을 갚으려는 사람들과 받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술꾼으로 북적였다. 주인은 외상값을 받아 고맙다며 술 한 병을 공짜로 내놓는가 하면, 외상값을 갚았으니 다시 외상술을 시작하는 노동자도 있었다. 그리고 간조가 나왔다는 소식을 귀신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