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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파주 사람의 또 다른 이름은 ‘민간인’입니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특별한 희생’을 겪고 있는 지자체에 경기 남부의 공공기관을 이전하겠다는 ‘특별한 보상’을 발표했다. 그러자 파주시를 비롯 지자체가 유치전에 돌입했다. 파주시는 각 사회단체와 함께 ‘경기 서북부 중심이자 한반도 통일의 거점도시로서 파주가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라며 공공기관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파주의 희생은 무엇일까. 1960년대 파주에는 주한미군 캠프가 60여 개 있었다. 적성지역의 연방군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11개 읍면 중 9개 지역이 미군 기지촌이었다. 미군을 상대하는 파주의 미군 위안부는 1965년 정부의 공식집계에 4,589명이었다. 미성년자 등 비등록 여성까지 합치면 10,000여 명이 될 것이라는 게 행정기관 단속공무원의 증언이다.



 파주는 서울과 안양을 합친 면적이다. 파주 곳곳에는 ‘민간인통제선’과 ‘민간인통제구역’이 있다. ‘민간인’은 전시 상황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1949년 8월 12일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협약이 이루어졌다.


 파주 사람들은 집을 나서는 순간 민간인이 된다. 군부대 담벼락에 써 있는 ‘민간인 출입금지’에서부터 ‘접근하면 발포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문과 ‘맹견 순찰 중’이라는 경고가 곳곳에 붙어 파주민간인을 위협한다. 그리고 산과 들, 임진강 철조망에 매달려 있는 지뢰 표식과 접근금지를 알리는 곳곳의 구호는 교통 안내만큼 친근한 표지판이다.



 민간인은 군인과 경찰 그리고 정부 공무원을 제외한 국민을 일컫는다. 민간인은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지만 파주의 민간인은 통제의 대상이다. 군사정권 당시 파주의 민간인은 농사용 그늘막 하나 세울 수 없는 혹독한 시기를 겪어야 했고, 어려운 시기 먹고 살기 위해 임진강에서 실뱀장어를 잡다가 군인에게 붙들려가 두들겨 맞았던 것은 굶주림보다 더 힘든 기억이다.


 파주의 민간인은 국가안보로부터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국가안보를 위해 생명과 재산을 희생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국가안보를 수행하기 위한 군 훈련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수해왔다. 특히 파주는 대규모 미군 전용훈련장이 많아 미군 훈련 피해가 속출했다.



 서울올림픽 준비로 온 나라가 들떠 있던 1988년 봄. 파평면 장파리에서 일곱 살 아이가 미군 훈련 차량에 깔려 숨졌다. 장파리는 미군 전용훈련장이 바로 옆에 있어 탱크 등 훈련 차량의 통행이 많았다. 이 사건은 올림픽 분위기에 묻혔다.



 2000년 11월 14일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국도에서 길을 건너던 김 아무개(당시 67세) 씨가  미2사단 2여단 소속 페트 상병이 몰던 봉고승합차에 치여 일산 백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숨졌다. 2001년 7월 16일 조리읍 봉일천 미군부대 캠프하우즈 고압선에 감전돼 건설노동자 전동록(당시 54세) 씨가 일산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2002년 6월 6일 숨졌다. 그리고 일주일 후 무건리훈련장에서 훈련을 하고 양주 쪽으로 이동하던 미2사단 캠프하우즈 44공병대대 소속 워커 마크 병장이 몰던 교량전차에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이 깔려 숨졌다.


 

 2002년 9월 16일 법원읍 오현리 주민 박승주(당시 38세) 씨가 무건리훈련장에서 훈련을 하던  미2사단 공병여단 캠프에드워드 82공병대대 소속 ‘트랙터 트레일러’에 치어 숨졌고, 여중생 참사 사건 1년이 되는 2003년 6월 12일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 해병대가 파주에서 원정훈련을 하던 중 육군 25사단 노쾌석(당시 30세) 대위가 몰던 승용차를 들이받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본지는 파주시민들이 시민이 아니라 민간인으로서 어떤 피해를 겪으며 살아왔는지에 대해 현장사진연구소의 협조를 받아 ‘특별한 희생’을 연속 보도할 예정이다. 


民間人(김종삼 시)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境界線)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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