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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시신 끌어안은 위안부 120명, 미군부대 앞 시위

대한민국 첫 성병진료소가 들어설 정도로 천현면(법원읍)은 전국에서 몰려든 기지촌 여성과 미군 병사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밤이면 오색등불을 타고 들려오는 ‘락’과 ‘재즈’ 음악이 어둠 짙은 골목에 스며들어 법원읍은 광란의 거리로 휘청였다. 


 한국전쟁 이후 법원읍에는 군 병원인 ‘캠프 어윈’을 비롯 대능리, 가야리, 법원리, 금곡리, 웅담리 지역에 10여 개의 미군 캠프가 들어섰다. 특히 웅담리 ‘노패’에는 미군의 휴양소 역할을 하는 오락 시설(Recreation Center 2)이 들어서면서 주변에 미군클럽 등 미군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이 성황을 이뤘다.



 1965년 당시 파주의 총인구는 18만4천200명이었다. 이중 법원읍의 인구수는 2만7천180명으로 문산읍(임진면)의 2만6천180명, 파주읍(주내면)의 2만2천500명보다 많았다. 가구 수 역시 법원읍이 3,744가구로 국내 최대의 기지촌인 파주읍(3,446)보다 많았으며, 미군 위안부는 경찰과 보건소에 등록된 여성만 988명으로, 등록되지 않은 위안부와 미성년자를 포함하면 약 1,200명으로 추산된다.


 법원읍은 1970년대 초 미군 감축설이 나오면서 전례 없는 불경기가 휘몰아쳤다. 웅담리의 노패, 곰시, 버들메 마을의 경우 방 한 칸 사글세가 3,000원 하던 것이 500~600원으로 내렸고, 미군을 상대하던 접객업소와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당시 천현면사무소의 비공식집계를 보면 다른 지방으로 떠나는 전출자가 월평균 500여 명에 이르고, 전출 학생도 30여 명이 넘었다.


 미군의 범죄도 잇따랐다. 법원읍의 미군 범죄는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 직후인 1962년 급증했다. 1962년 2월 19일 밤 7시 미제1기갑사단 공병대 ‘윌리암 그리’ 상병은 법원읍 가야리 유 아무개 씨 집에 세 들어 사는 신 아무개(24) 씨와 동침한 후 자신의 저고리 주머니에 넣어둔 군표(군사용 달러) 70불이 없어졌다며 임신 4개월째인 신 씨를 폭행했다.



 대한인권옹호협회(회장 박한상)는 임신부를 폭행해 낙태를 시킨 것은 살인 행위라며 미군 측에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한편 자체 조사한 사건 경위를 공개했다.


 당시 조사 내용을 보면, 미제1기갑사단 소속 ‘윌리암 그리’ 상병은 가야리 일대 기지촌을 헤매다가 피해자인 신 아무개(24) 씨 집에 들어갔다. ‘그리’ 상병은 한 칸도 못 되는 신 씨의 방에 들어가 다짜고짜 문을 잠그고 신 씨를 때리기 시작했다. 신 씨는 ‘그리’ 상병을 이날 처음 봤다고 진술했다.


 ‘윌리암 그리’ 상병은 방문을 잠근 뒤 신 씨의 몸을 입으로 물어뜯고 머리채를 잡아 방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등 마구 때리는 바람에 놀란 신 씨가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무릎을 꿇어 때리지 말 것을 사정했다. 그러나 ‘그리’ 상병은 잠시 후 욕구를 풀고도 구두를 신은 채 침대에 누운 신 씨를 무자비하게 후려갈기고 발길질을 했다.


 신 씨의 비명 소리에 집주인 유 아무개(38) 씨가 뛰어나와 방문을 열려고 했으나 안으로 잠겨 있어 밖으로 나가 순찰 중인 미군 헌병에게 신고했다. 헌병은 신 씨의 몸을 수색했다. 군표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 상병은 ‘미제19CID’로 끌려갔다.


 폭행을 당한 신 씨는 출혈과 고열로 ‘자혜병원’에 입원했다. 한국인 의사 최 아무개 씨는 허리와 복부 등 전신에 나타나 있는 타박상으로 볼 때 폭행으로 인한 유산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미제15야전의무대 중대장 ‘부렉 빌’ 대위는 낙태 원인이 폭력보다는 ‘인스트루멘트(기구를 사용한 인공유산)’라고 주장했다.


 미8군은 신 아무개 씨에게 장교 두 명을 보내 위로금 6,500환을 전달했다.



 이어서 천현면 웅담리 강 아무개(22) 씨가 15개월 전부터 동거를 해온 미제1기병사단 5연대 2대대 A중대 소속 ‘제트’ 상병에게 마을 뒷산에서 손발이 묶인 채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2년 4월 18일 오후 5시께, 강 씨가 이웃 마을 다른 여자에게 가 있는 ‘제트’ 상병을 찾아가 몇 달째 밀린 생활비를 요구하자 강 씨를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구두끈으로 손발을 묶고 새끼줄로 입을 틀어막은 후 마구 폭행한 것이다. 강 씨는 마을 주민에게 발견돼 구출됐다.


 그리고 1962년 6월 4일 밤 10시 35분께 천현면 법원리 90번지 함 아무개(53) 씨 집 곁방에 위안부 김 아무개(22) 씨와 동거 중이던 미제1기갑사단 소속 ‘존 R 베네로우’ 이등병이 반지를 낀 주먹으로 김 씨의 얼굴을 마구 때리고 발로 배를 걷어차 기절시켰다.


 김 씨는 이날 ‘베네로우’ 이등병에게 다른 여자와 교제를 하고 있느냐고 묻자 막무가내로 폭행했다고 미군헌병대에 진술했다. 김 씨는 민성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미군 당국은 가끔 상인들을 길들이기 위한 차원에서 기지촌 출입금지령을 발동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주민들이 긴급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미군 관계자를 면담하는 등 초비상사태가 되었다. 미제1기갑사단은 1963년 12월 29일 미군들이 출입하는 각 기지촌의 위생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천현면(법원읍) 법원리를 비롯 10여 개 마을에 ‘미군출입금지령’을 발동했다.


 주민들은 미군 당국의 이 같은 조치에 긴급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전 주민을 동원해 기지촌 청소를 하는 한편 위안부들은 매일 아침 골목길 정비와 숙소 환경 개선 작업에 나서는 등 금지령 해제를 위해 미군 간부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미군부대 카투사의 횡포도 빈번했다. 1965년 3월 13일 오전 11시께 천현면 웅담리 새마을다방에서 카투사 정해수(25) 상병과 이종화(24) 상병이 미군과 차를 마시고 있는 위안부 이 아무개(21) 씨를 희롱하다가 주민들로부터 제지를 당했다.


 다음날 카투사 60여 명이 무더기로 나와 웅담리 새마을다방 주변 민가를 뒤져 위안부 이 아무개 씨와 주민 정 아무개 씨를 찾아내 집단폭행한 후 파주경찰서 웅담파출소로 끌고 가 경찰관에게 위안부와 주민을 유치장에 가두라며 난동을 부렸다. 그러나 경찰관이 법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하자 카투사 60여 명은 “그렇다면 이 자식들을 우리가 때려죽이겠다.”라며 경찰이 보는 앞에서 또다시 폭력을 휘둘렀다.



 살인사건도 있었다. 1963년 10월 3일 오후 7시 30분께 천현면(법원읍) 웅담리 노패마을에 있는 ‘캠프 해리스(Camp Harris)’ 소속 ‘헤머튼’ 병장이 웅담리의 미군 제2휴양소(RC2) 앞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위안부 박 아무개(23 웅담2리) 씨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얼굴과 머리 등을 마구 때렸다. 실신한 박 씨는 조리읍 오산리에 있는 미군 제44병원으로 긴급 후송돼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이틀 후인 5일 낮 12시 끝내 숨졌다.


 박 씨의 사망 소식을 접한 웅담2리 이 아무개(28) 씨 등 위안부 120여 명은 동료의 시신을 끌어안고 미제1보병사단 제2공병대 B중대 정문 앞으로 몰려가 한국의 병원이 숨진 박 씨의 시신을 해부해 줄 것과 ‘헤머튼’ 병장의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럼에도 미군들의 횡포는 계속됐다. 미제7사단 76포대 B중대장 ‘레인 할트’ 중위는 위안부 이 아무개(25) 씨를 마구 때려 앞니를 부러뜨리는 행패를 부렸다. 1966년 11월 3일 오후 6시 30분께 천현면 웅담리에서 미군 ‘로켄’ 병장과 동거하던 이 씨가 뜻하지 않게 임신이 되자 부대로 ‘로켄’ 병장을 찾아가 낙태비를 달라며 언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할트’ 중위가 다짜고짜 이 씨의 배를 발로 걷어차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등 행패를 부린 것이다.



 이처럼 미군의 무수한 폭력이 달콤한 달러에 묻히고, 도시가 술에 취해 있던 1960년대, 북한의 124군 부대 김신조 일당이 미군의 군사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법원읍 초리골 야산을 넘었다.


 이율곡 선생과 신사임당의 묘가 모셔져 있는 법원읍은 외국 군대의 군사문화에 젖어 그 생채기를 곳곳에 남기고 있다. 그리고 서비스산업으로 살아온 주민들은 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마약 같은 군사 경제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또한 군사훈련장 확장으로 400년 된 자연마을이 통째로 쫓겨나도 여전히 법원읍은 국가 안보를 우선하고 있다.


 미군이 법원읍에서 철수한 지 반세기가 되었지만 무건리훈련장 피해는 진행형이다. 아직도 국가는 법원읍 주민들에게 ‘특별한 희생’을 강제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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