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기지촌에서 태어나 해외 입양된 혼혈인 7명이 3일 파주경찰서를 방문해 엄마를 찾아달라고 호소했다. 경찰은 한국말을 거의 못 하는 이들에게 통역 직원을 배치하고 붐비는 민원실 대신 별도의 사무실로 안내해 김은주 민원실장이 접수에 필요한 자료를 직접 챙겨주는 등 따뜻하게 맞이했다. 경찰은 전날 혼혈입양인들이 생모를 찾기 위해 경찰서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담당 직원이 경찰서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들을 민원실로 안내하기도 했다. 혼혈입양인들은 파주시의회 손배찬 의장과 안소희, 박은주 의원을 면담하고 시의회가 엄마 찾기에 나서 줄 것을부탁했다. 손배찬 의장은 “어린 나이에 해외로 입양돼 적지 않은 외로움이 있었을 것인데 이렇게 모국을 잊지 않고 찾아와 고마운 마음이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시의원들에게 여러분의 사연을 전달해 어머니를 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위로했다. 이날 혼혈입양인들은 광탄, 법원, 파주, 문산 등 자신이 태어난 마을 경로당을 찾아 입양 서류에 적혀 있는 어머니 이름을 어른들에게 수소문했다. 이 중 1970년 문산읍 운천3리에서 흑인 혼혈로 태어나 다음 해인 1971년 7월 덴마크로 입양된 황명희 씨가 자신을 키워준 유모
파주에서 태어나 해외로 입양됐던 이은숙(Natasha Pruss) 씨 등 혼혈인 7명이 다음 달 3일 파주를 찾는다. 이들은 1960~70년대 미군 아버지와 한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 등으로 입양됐다. 1979년 미국으로 입양된 이은숙(53) 씨는 파주군 천현면 웅담리에서 태어나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며 웅담초교를 5학년까지 다녔다. 그러던 중 할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미국인 사진기자에 의해 입양됐다. Natasha Pruss(이은숙)는 현재 델타항공 승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은숙 씨는 지난 2015년 미국을 방문한 이용남 사진가를 통해 자신이 다녔던 웅담초교의 생활기록부를 보고 싶다는 편지를 웅담초교 교장 선생님에게 전달했으나 “본인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다.”라는 학교 방침에 따라 실현되지 못했다. 9월 3일 파주 방문 시에는 이 소망이 이루어질지 관심이 모아진다. 이날 파주를 방문하는 혼혈입양인들은 조리읍 오산리, 광탄면 신산리, 문산읍 운천리, 파주읍 봉서리, 법원읍 웅담리 ‘버들뫼’와 ‘노패동’ 등 자신이 태어난 마을을 방문한 후 10일에는 서울대에서 개최되는 ‘한국 기지촌 콘퍼린스’에 참가하고, 12일에는 조리읍 봉일천 반환
“몰라요. 부산 당감동 어떤 교회에서 잘 키워주겠다고 했는데...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대요. 이제 늙어서 어떻게 찾을 수도 없고... 선생님들이 좀 도와주세요.” 파주 법원읍 웅담리의 고금순(73) 할머니 사연이다. 할머니는 1946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때 가족과 함께 제주도 피란민수용소로 갔다가 부산으로 옮겼다. 할머니 동생은 여동생 세 명과 남동생 두 명 등 모두 다섯으로, 부산에서 태어났다. 할머니가 애타게 찾는 막내 여동생은 고복순(1963년생 추정) 씨다. 할머니는 어머니(송정숙)가 막내동생을 출산한 후 중풍에 걸려 거동을 못 하게 되자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그러다가 지인의 소개로 파주 웅담리 사람과 결혼을 해 이제껏 노패동에서 살고 있다. “내가 식모살이를 떠날 때 복순이가 미국으로 입양됐다는 얘길 들었어요. 엄마가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못 하고 서울행 기차를 탔던 게 너무 가슴이 아파요. 그때 복순이를 찾았어야 했는데... 이제라도 꼭 찾았으면 좋겠어요.” 고금순 할머니는 구두공인 아버지가 구두 밑창을 꿰맬 때 썼던 실을 징표로 갖고 있다. 아버지가 큰 딸인 자신에게 물려 준 것
“북한이 왜 우리의 적이야? 우리를 태평양전쟁 총알받이로 내몬 일본놈들이 적이지...” 일제강점기 만주로 끌려가 군사훈련 교육을 받았던 손진규(96) 옹의 말이다. 손 옹은 북한 개성 사람이다. 1943년 일본군에 끌려가 군사훈련을 받았다. 태평양전쟁에 동원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해방이 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한국군에 들어가 여순사건 진압에 투입됐다. 한국전쟁 때는 육군 보병 제1사단 소속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등 문산지구를 사수했고,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을 쫓아 이른바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손 옹에게 국가유공자 대우와 무공수훈자 화랑훈장을 수여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이 동족에게 총을 겨누는 거야. 김구 선생 암살을 봐.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그게 다 우리(남북한)를 갈라놓으려는 일본, 미국, 중국, 소련 때문이었잖아. 그런데 왜 우리끼리 싸우고 있는 거야? ‘트럼프’를 믿을 수 있어? 북한의 입장에서는 가진 게 핵뿐인데 그걸 내놓으라면 누가 그렇게 하겠어?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이야.” 손진규 옹은 압록강 철교에 김구 선생 사진이 길게 걸
1964년 법원읍 웅담리 ‘노패 마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된 ‘린다’ 씨가 어머니를 찾아 한국을 방문한다. 린다 씨는 1960년대 웅담리에 주둔한 미군 아버지와 노패 마을 슈퍼에서 일을 하던 어머니 이선옥(76) 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난 그 해인 1964년 서울 이태원의 한국여성과 결혼한 미군 부부에게 입양됐다. 린다 씨는 입양된 뒤 친아버지를 만나 젊었을 때 어머니 모습이 담긴 사진을 받았다. 사진 중에는 유모가 안아주는 모습이 빨간색 동그라미로 표시돼 있는데, 친아버지는 이 유모가 당시 ‘노패 마을’ 주민이었다고 알려주었다. 현장사진연구소가 미국에서 보내온 사진 속 뒷배경과 현재의 웅담리 노패 마을 주변 모습을 비교한 결과, 당시 미군부대 뒤 파평산이 일치했다. 린다 씨는 9월 3일 고향 웅담리 노패 마을을 친아버지와 함께 방문해 어머니의 행적을 더듬고, 12일 파주시가 해외입양인을 위해 조리읍 봉일천 반환 미군부대 캠프 하우즈에 조성한 ‘엄마 품 동산’ 준공 기념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린다 씨의 어머니 이선옥 씨와 유모를 알고 있는 분은 현장사진연구소 031-943-7600으로 연락해주길 기대한다.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 삼륭물산 물류센터에서 1일 오후 5시 12분께 화재가 발생했다. 소방당국은 대응 2단계를 발령했다. 휴가 중인 최종환 파주시장은 현장에 나와 상황을 보고받고 폭염 속 소방대원을 격려했다. 최 시장은 안전총괄과 이종칠 과장에게 ‘소방관들이 땀범벅으로 탈진될 우려가 있으므로 파주시가 탈진 보충제인 식염포도당 지원을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식염포도당은 포도당과 염화나트륨(소금) 성분으로, 알약과 주사제 두 종류가 있는데 주사제는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하지만 알약은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다. 불은 4천722㎡ 규모의 창고 건물과 안에 있던 가구, 매트리스 등을 전부 태우고 10시간 만인 2일 오전 3시께 4억5000만 원의 재산피해를 내고 진화됐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한복 차림의 어머니가 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 이른바 ‘모자동상’이다. 법원읍 ‘부인의원’ 정원에 세워져 있던 이 동상이 ‘엄마 품 동산’에 기증됐다. ‘엄마 품 동산’은 조리읍 봉일천리 반환 미군부대 캠프하우즈에 조성돼 9월 준공을 앞두고 있다. 파주 사람들에게 산부인과로 더 잘 알려진 ‘부인의원’은 1961년 천현면(현 법원읍) 법원리 447번지에 개원했으나 행정당국에는 1971년 12월 200여 평 규모의 2층 건물과 8개의 입원실이 등록돼 있다. 이는 ‘부인의원’이 처음 10여 평짜리 건물에서 기지촌 여성들의 진료를 보는 것으로 시작해 몇 차례 자리를 옮겼다가 병원 건물을 신축하면서 파주시 보건소에 등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처음 개원했던 부인의원 자리는 현재 빈터만 남아 있다. “손님이 얼마나 많았는지 저기, 저 길까지 늘어섰었어요. 거의 뭐, 미군을 상대하는 양색시들이었죠. 나도 큰딸을 저기서 낳았어요.” 부인의원 옛터 옆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유 아무개 할머니의 회고이다. 부인의원 고 남영원(85) 원장의 아들 김주현 씨는 ‘모자동상’ 건립에 대해 “어머니가 산부인과를 운영하면서 수천여 명의 산모가 하나같이 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는
한국전쟁 이후 파주 지역의 영화관은 문산 등 미군이 주둔하는 북파주지역 기지촌에서 개관했다. 1960년 파주군 인구는 14만8,103명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287명 더 많았다. 그러나 1961년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3,352명이 더 많은 15만860명으로 늘어났고, 1970년에는 19만1,434명으로 증가한 후 그 다음 해인 1971년에는 16만3,531명으로 2만7,903명이 줄었다. 이는 미국의 닉슨 독트린 정책에 따라 미군이 철수하면서 여성들이 함께 빠져나갔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임진면(문산읍)에는 문산극장, 문산복지관, 세기극장, 서부극장이 있었고, 파평면에 장마루극장, 신영극장 아동면(금촌동)에 금촌복지관, 금촌극장 주내면(파주읍)에 문화극장, 전진극장 천현면(법원읍)에 해동극장 광탄면에 광탄극장, 적성면에 적성극장 등 7개 지역에 13개의 영화관이 있었는데, 이중 세기극장과 서부극장은 극장 이름을 바꿔 운영했다. 다목적극장인 복지관의 ‘쇼쇼쇼’는 가장 인기 있는 볼거리였다. 파주의 영화 간판 대부분을 도맡아 그렸던 차명천 씨는 “인기 코메디언 구봉서, 곽규석, 서영춘, 백남봉, 백금녀 등과 가수 이미자, 현미, 자니리, 위키리, 태원, 황금
“친어머니는 생후 4개월 된 저를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입양시켰습니다. 제가 살던 코네티컷 주는 백인 중산층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제 얼굴 생김새가 아몬드 모양의 눈매에, 코는 납작하고, 피부는 연한 올리브색이어서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인들은 생김새가 남다른 저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니었던 저는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생김새에 대해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깊숙이 묻어둔 채 저는 외로움과 고립의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1987년 김해에서 남자아이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된 이익종 씨의 모국(한국) 방문 소감이다. 이익종 씨를 비롯 세계 각국으로 입양된 40여 명이 파주시가 반환 미군부대 캠프 하우즈에 조성한 ‘엄마 품 동산’을 찾았다. 장맛비가 쏟아진 26일 입양인들은 엄마의 자궁을 형상화한 조각상 등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 파주시에 고마움을 전했다. 최종환 파주시장 당선인은 ‘엄마 품 동산’을 찾은 입양인과 모국 방문을 추진한 미국의 비영리단체 미앤코리아 관계자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입양인들은 이날 판문점과 광탄 마장호수 출렁다리, 헤이
“뼈 빠지게 농사지으면 뭐해요. 먹거리가 천덕꾸러기가 된 세상인데요. 아무리 편하고 좋은 세상이라고 한들 농산물이 대접을 받지 못하면 좋은 세상이 아니에요.” 밭에서 감자를 캐던 중 옛 쌀방앗간 설명을 부탁받고 달려온 주익환(78) 씨가 한 말이다. “여기 입구에 벼를 쏟아부으면 승강기 안에 바가지가 벼를 퍼 올려 도정이 시작되는데, 저쪽 뒤에 있는 바람구멍으로 쌀껍데기 왕겨가 벗겨져 나가고, 그 옆에 돌을 골라내는 석발기를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저기 저 마지막 통에서 반짝반짝하게 쌀에 광을 내면 하얀 쌀이 쏟아져 나오지요.” 마지방앗간은 한국전쟁 때 서너 차례 피란을 반복하다가 1960년대 지어졌다. 식현리와 붙어 있는 이 마을에는 미군과 터키군이 주둔했었다. 방앗간에는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쇠바퀴 수십여 개에 크고 작은 피대(벨트)가 그대로 걸려 있다. 이 쇠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손으로 시동을 거는 발동기였다. 지금은 버스 엔진으로 사용하고 있다. “발동기로 벼를 찧는 것보다 버스 엔진으로 찧는 것이 훨씬 쌀이 좋아요. 통통 퉁퉁거리는 발동기는 동력 전달이 불규칙해 쌀이 어느 때는 세게 부딪쳤다가 또 어느 때는 아주 느리게 회전해 쌀에 광도 잘
예전에는 여관방에서 밤을 보내려면 숙박인 명부에 이름과 본인을 증명할 수 있는 사항을 기재해야 했다. 그리고 한밤중에 잠을 자고 있으면 경찰이 임시검문(임검)을 나와 숙박인 명부에 기재된 내용과 숙박인이 같은 사람인지 확인을 하곤 했다. 깐깐한 여관 주인은 아예 주민등록증을 제출받아 직접 숙박인 명부를 작성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1980년대까지 파주군 숙박업 현황을 보면 여관, 여인숙 등 숙박업소가 134곳 있었다. 이중 적성면에 38곳으로 가장 많았고, 문산에 35곳, 금촌에 28곳, 파주에 9곳, 파평에 7곳, 법원에 6곳, 광탄에 5곳, 조리에 4곳, 월롱에 2곳, 탄현에 1곳이 있었다. 적성면에 숙박업소가 많았던 이유는 군부대의 영향이 큰 것으로 짐작된다. 게다가 당시 북파주의 대중교통이 하루에 두서너 번 버스가 다닐 정도여서 당일치기로 군대 간 아들 면회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숙박시설은 대부분 무허가 영업이었다. 그러다가 60년대 들어서서 행정기관에 신고를 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파평면 장파리에 삼화, 황해, 한일여관이, 법원읍에 밀림, 명신여관이, 광탄면에 예사랑과 우일여관이, 문산과 금촌에 각각 반도여관과 성심여관이
“가을걷이 때 소달구지를 타고 밥재(적성면 식현리 국사봉) 고갯길을 오르면 무장한 터키군이 막 쫓아와 끌어내리곤 했어요. 왜 소를 힘들게 하느냐며 걸어서 가라는 거였지요. 터키 사람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었거든요. 그리고 식현리에는 군복 수선집이 아주 많았어요.”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부대에서 통역을 맡았던 윤상현(85) 씨의 회고이다. 한국전쟁 당시 적성면 식현리 밥재 고갯마루에 터키군 부대가 있었다. 터키군은 연합군 중 가장 용맹했다. 그래서 미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받았다. 터키군이 경기 양주와 용인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파주에 주둔하게 된 때는 1961년께이다. 터키군 부대 주변은 미군 기지촌과는 달리 술집이나 양복점 등이 거의 없었고, 대신 군복 수선집이 많았다. “터키 군인들이 한국에 올 때 삼베옷 같은 것을 입고 왔어요. 그러면 미군들이 군복을 지급했는데 그 군복이 미군용이라서 몸에 맞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히 옷 수선집이 많이 생겨난 거죠.” 윤 씨가 식현리에 옷 수선집이 많았던 이유를 설명했다. 터키군은 한국전쟁에 1개 보병여단 5,455명이 참전해 741명이 사망하고 실종 163명, 포로 244명, 부상 2,068명 등 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