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 여깄어요.” “거기 있으면 어떡해? 이쪽으로 내려와…” “보호자는 거기 못 내려가요. 여기 있으래요.” 주말인 24일 파주시 시민회관에 마련된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 2층 보호자 대기실이 소란하다. 1층 접종센터에 있는 부모님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려고 소리를 지르거나 손을 흔들어 눈을 맞추려고 부모님이 각 접종 단계로 이동할 때마다 보호자들도 동선을 따라 옮겨 다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백신 효도 현장이다. 백신 접종을 하려면 우선 시민회관 입구에서 접수한 후 접종 번호와 ‘보호자’라고 쓴 목걸이를 받게 된다. 그런 다음 접종센터 안으로 들어가 체온과 예진표를 작성하게 되는데, 이때 휠체어를 이용하는 어르신은 보호자와 함께 동행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어르신의 보호자는 2층으로 올라가 접종 과정을 참관하게 된다. 접종 대상자인 어르신들은 의료진의 예진을 거쳐 백신 접종을 하고, 전산 등록을 마친 다음, 백신 이상 반응을 모니터링하는 대기실에서 15분~30분을 기다리게 되는데, 이때가 어르신과 보호자 모두 가장 긴장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보호자들은 부모님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전화를 건다거나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함으로
최종환 파주시장은 장애인의 날인 20일 시민회관에 마련된 파주시 코로나19 백신 예방접종센터를 방문해 예약된 시간에 나오시는 어르신과 예약 시간보다 일찍 나오시는 어르신들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맨바닥에 앉거나 서서 기다리는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보고 관련 부서에 의자와 휠체어를 긴급 구입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파주시 보건소 건강증진과와 재난안전총괄과는 의자 150개와 휠체어 30개를 긴급 구입해 접종센터 안과 밖에 배치하는 등 어르신들의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화이자 백신 접종 대상자 806명 중 763명이 접종해 총 대상자 4,118명 중 96.2%인 3,960명이 접종을 마쳤다.
“엄마 나 여기 있어요.” 19일 시민회관에 마련된 ‘파주시 백신접종센터’에 어르신들을 모시고 함께 온 가족들이 접종센터 2층 관중석에서 어르신과 눈을 한 번 맞추려고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두 팔을 들어 소리친다. 어르신 대부분은 관중석의 가족 응원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어쩌다 눈을 마주친 어르신은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기도 한다. 관중석에서 내려다보는 접종센터는 마치 미로 찾기 게임 같다. 어르신들 대부분은 100세 시대에 걸맞게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다. 그러나 치매와 청각장애를 겪고 있는 어르신도 있어 의료진과 행정요원들의 각별한 관심이 더해지기도 한다. 예진을 맡은 의료진이 어르신한테 증상을 물어도 귀가 어두워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두 번 세 번 묻는 바람에 다음 순서가 조금씩 지체되기도 하지만 모두가 차분한 자세로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보건당국 직원들이 접종센터에서 제일 많이 쓰는 단어는 ‘아버님’, ‘어머님’, ‘어르신’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선생님’ 같은 칭호는 쓰지 않는다. 백신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어르신들을 가족처럼 모셔야 한다는 파주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접종센터 2층 관중석에서 이리저리
파주시민회관에 설치된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 접종을 마친 75세 이상 어르신과 의료진이 서로 허리를 깊이 굽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나눈다. 또 다른 의료진은 귀가 어두운 어르신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바짝 붙어 상냥한 어조로 접종 후 지켜야 할 수칙을 설명한다. 어르신 접종 시작 나흘째인 18일 이른 아침. 김회광 부시장을 비롯 보건당국 관계자들이 각자 맡은 위치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우왕좌왕하던 첫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어르신들도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곳곳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이 여유롭다.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천장 높은 시민회관에 울려 퍼진다. 접수하면서 “고맙습니다.” 온도를 재며 “고맙습니다.” 의사에게 예진을 받으며 “고맙습니다.” 간호사에게 접종을 받으며 “고맙습니다.” 접종 후 119구급대원이 안내하는 15분 대기실에서 “고맙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성숙한 시민의식이 아닐까. 이러한 서로의 배려와 격려가 코로나19를 이겨낼 힘이 될 것이리라. 이날 접종 대상자 402명 중 394명이 접종을 해 98%의 접종률을 보였으며, 총 접종자는 2,51
금촌에 문산중학교가 있다. 문산중학교는 한국전쟁 당시 문산에서 금촌으로 피란을 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문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문산의 학교 터에 미군부대 캠프 자이언트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파주군청과 경찰서 등 공공기관도 금촌으로 이전하면서 문산을 비롯 북파주지역은 정부로부터 특별한 희생을 강요받기 시작했다. 북파주지역의 미군 주둔은 평생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오던 농민들에게 급격한 경제체제의 변화를 강요했다. 즉 농경산업에서 제조산업인 2차산업을 뛰어넘어 바로 서비스산업을 강요받게 되는데, 이는 결국 서비스 대상인 미군이 철수함에 따라 지역경제가 큰 혼란에 빠져드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1991년 5월 6일 밤 10시 30분께 선유4리 미2사단 17포병 2대대 ‘캠프 펠램’ 정문 앞길에서 이 부대 미군 20여 명이 술에 취한 채 쇠파이프 등으로 ‘맨 양복점’(주인 김덕영 38) 등 5개 점포 대형 유리창과 철제문을 부수며 행패를 부렸다. 이날 난동은 미군병사 두 명이 문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선유리 부대 앞에 내린 후 택시비를 내지 않고 부대 안으로 도망간 것에 주민들이 항의하자 미군 20여 명이 쇠파이프를 들고 나와 점포를 부수면서
어르신 백신 접종이 휴일인 17일에도 이어졌다. 파주시 시민회관 대공연장에 마련된 예방접종센터 앞에는 적십자파주지구협의회와 해병대파주시전우회 등 자원봉사단체가 아침 일찍부터 나와 어르신들과 밀려드는 차량을 안내했다. 어르신들은 대부분 접종 예약 시간보다 일찌감치 도착해 접수대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가 접종 예진실로 들어갔다. 파주시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어르신들을 미리 파악해 계단으로 되어 있는 시민회관 입구를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도록 임시 통행로를 만들어 편의를 제공했다. 최종환 파주시장과 김회광 부시장도 접종센터에 나와 불안해하는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화이자 백신에 대한 설명을 해드렸다. 접종센터에 투입된 직원들도 첫날과는 달리 차분하면서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특히 직원들은 어르신들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웃음 띤 얼굴로 환하게 맞았다. 접종을 마친 어르신들은 대기실에서 15분 정도 기다렸다가 귀가하게 돼 있는데, 119구급대원이 번호를 부르며 집에 가도 좋다고 하면 어르신과 보호자의 굳었던 얼굴이 활짝 펴지는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날 접종 대상자 805명 중 784명이 접종을 해 97.4%의 접종률을 보였다. 15일부터
파주시 (시장 최종환)가 만 75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화이자 백신 접종을 시민회관에 설치된 예방접종센터에서 시작했다. 이날 첫 접종자는 올해 100세인 강신순 할머니로 기록됐다. 강 할머니는 접종 시각 30분 전에 예방접종센터에 도착해 체온 체크를 하고 예진표를 작성한 뒤 접종실로 이동해 오전 9시 정각에 화이자 백신 주사를 맞았다. 최종환 파주시장은 예방접종센터를 찾아 접종 상황을 점검하고 관계자들을 격려하며 접종 대상자가 고령층인 만큼 불편함이 없도록 꼼꼼히 챙길 것을 당부했다. 김순덕 보건소장은 “파주시민회관에 설치된 예방접종센터에 나오실 때는 접종 일자를 꼭 확인하실 것과 접종 후에도 생활방역 준수와 마스크 착용을 부탁드린다.”라고 말했다. 파주시 75세 이상 접종자는 총 3만93명으로 5월 16일까지 금촌에 있는 파주시민회관 예방접종센터에서 진행된다. 백신 접종 첫날 접종자는 15일 노인시설 36개소 598명 중 573명으로 95.8%의 접종률을 보였다.
미군 위안부들이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려 3명이 숨졌다. 1980년 3월 27일 밤 9시 50분 파주군청 보건소 소속 마이크로버스(운전자 이용호 47)가 성병 검진증이 없거나 미성년자 등 단속에 걸린 9명을 태워 금촌의 ‘파주여자기술양성원’으로 호송하던 중 위안부들이 몰래 창문을 열고 뛰어내린 것이다. 이 사고로 천현면 법원리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던 김 아무개(23) 씨와 전북 무안군에서 올라온 송일순(19) 씨, 경기도 의정부시의 박 아무개(20) 씨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주내면 연풍리 ‘캉캉살롱’에서 접대부로 일하던 최 아무개(22) 씨 등 5명이 중상을 입고 금촌도립병원(현 파주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1명은 도주했다. 파주경찰서는 단속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파주군청 부녀계장 경귀현(49) 씨와 부녀상담원 김선옥(28) 씨 등 직원 9명을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당시 파주군청이 단속에 걸린 위안부를 강제 입소시키려 했던 곳은 금촌에 있는 ‘파주여자기술양성원’이었다. 파주시보건소 아래에 있던 이 양성원은 현재 식자재 마트로 바뀌었다. ‘파주여자기술양성원’은 1963년 6월 31일 83만 원을 들여 ‘파주군립부녀직업보도소’라는 이
국내 최대의 미군 기지촌으로 알려진 파주 용주골이 발칵 뒤집혔다. 미국이 극동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군표(Military Payment Certificate)를 1964년 1월 6일 자정을 기해 일제히 갱신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엔군사령부는 주한미군 전 장병에게 금족령을 내리는 한편 미군부대에 출입하는 한국인 종업원의 출입도 모두 금지했다. 3년 만에 바뀐 군표 갱신은 미군부대 주변 주민들은 물론 상가에까지 큰 충격을 줬다. 특히 군표가 갱신될 때마다 가장 큰 애를 먹은 것은 미군을 상대하는 미군 위안부들이었다. 가지고 있는 군표를 새 군표로 바꾸지 못하면 그냥 휴짓조각이 되기 때문이다. ‘군용수표’로 불리는 군표(11cmx6.5cm)는 해외에 주둔하는 군대의 정부가 발행한 특수 화폐이다. 우리나라는 1945년 미국이 한반도를 점령하면서 모든 미군이 본토 달러 대신 이 군표를 사용하게 했다. 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 사람들은 이 군표로 미군부대 PX 상품을 마음대로 살 수 있어 군표는 미국의 본토 달러보다 그 가치가 상당했다. 미 군표가 바뀌었다는 소식이 알려진 1964년 1월 7일 아침, 미제1기갑사단 예하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파주지구 일대에는 약
대한민국 첫 성병진료소가 들어설 정도로 천현면(법원읍)은 전국에서 몰려든 기지촌 여성과 미군 병사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밤이면 오색등불을 타고 들려오는 ‘락’과 ‘재즈’ 음악이 어둠 짙은 골목에 스며들어 법원읍은 광란의 거리로 휘청였다. 한국전쟁 이후 법원읍에는 군 병원인 ‘캠프 어윈’을 비롯 대능리, 가야리, 법원리, 금곡리, 웅담리 지역에 10여 개의 미군 캠프가 들어섰다. 특히 웅담리 ‘노패’에는 미군의 휴양소 역할을 하는 오락 시설(Recreation Center 2)이 들어서면서 주변에 미군클럽 등 미군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이 성황을 이뤘다. 1965년 당시 파주의 총인구는 18만4천200명이었다. 이중 법원읍의 인구수는 2만7천180명으로 문산읍(임진면)의 2만6천180명, 파주읍(주내면)의 2만2천500명보다 많았다. 가구 수 역시 법원읍이 3,744가구로 국내 최대의 기지촌인 파주읍(3,446)보다 많았으며, 미군 위안부는 경찰과 보건소에 등록된 여성만 988명으로, 등록되지 않은 위안부와 미성년자를 포함하면 약 1,200명으로 추산된다. 법원읍은 1970년대 초 미군 감축설이 나오면서 전례 없는 불경기가 휘몰아쳤다. 웅담리의 노패, 곰시, 버들
“내가 성병이 뭔지 알기나 알았어? 미군클럽에서 일하거나 살림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와서 받으라니까 그냥 반강제적으로 끌려가다시피 한 거지. 그때가 열아홉 살이었어. 선유리 거기에 성병진료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일 주일에 두 번씩 받았지. 그것도 일찍 가지 않으면 길게 줄을 서서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지나가곤 했었지.” 1948년생 박 아무개 씨의 기억이다. 보건사회부는 1960년 9월 24일 미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파주 10개소, 양주 5개소에 성병진료소를 설치해 외국인 상대 여성을 일 주일에 두 번씩 검진하는 성병관리 시범사업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1962년 9월 7일에는 경기도청에서 한미친선위원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경기도를 대표해 박창원 경기지사가, 미군 측에서는 미1군단장 ‘휴·P·헤리스’ 중장과 참모 등 관계자 30여 명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미군 위안부에 대한 성병관리 강화대책으로 성병 검진을 받은 사람에 한하여 위안부 행위를 허용하고, 성병진료소 감독원(의사) 10명을 증원 배치하는 한편 경기도 보건사회국은 성병진료소의 증설 필요성에 따라 최소 10~20개소의 성병진료소를 증설하기로 했다. 당시 경
“우리 영감도 농약 먹고 죽었어요. 저기, 저 집 아줌마도 그렇고, 그 윗집 내 친구도 농약을 먹었어요. 요기, 이 집은 세 식구가 모두 농약을 먹고 자살했어요. 아휴… 장파리에 농약 먹고 죽은 사람이 열도 넘어요. 열이 뭐야, 스무 명도 넘을 거야.” 파평면 장마루촌 김인예 할머니의 지우고 싶은 기억이다. 파주바른신문은 이재명 경기지사의 ‘특별한 희생’과 ‘특별한 보상’이 어떤 기준으로 얼마나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 의미로 파주의 9개 지역 38개 기지촌의 상처와 아픔을 현장사진연구소와 미 육군 제19범죄수사대의 자료 협조를 받아 연재한다. 한국전쟁이 멈춘 1960년대 장마루촌은 술 취한 미군과 팔짱을 낀 여성들로 하루종일 북적였다. 해가 넘어가면 논밭 일을 마친 주민들도 호미와 낫을 손에 든 채 쿵작거리는 미군클럽 안을 곁눈질로 들여다보며 걸음을 재촉하는 게 장마루촌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훈련 나온 미군에게 술 등을 팔아 생계를 이어오던 정 아무개(당시 37세) 씨는 극심한 생활고를 비관해 아내 배 아무개(30) 씨, 7살 아들, 4살 딸 등 가족과 함께 1967년 2월 13일 오전 8시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 배 씨 가족은 주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