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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소식

판문점 근처 미군훈련장 끌려다니며 하루 20명 상대

한국과 미국 정부는 반드시 사과와 보상을 해야 한다.

김영실 씨는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나 충남 천안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직후 군대에서 사망했다. 어머니는 그가 아홉 살 때 재혼했다. 16살 때 방직공장에 다니는 친구가 직장을 소개해 준다고 했다.
 
천안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용주골 버스를 탔다. 거리에 미군들이 보였다. 친구와 여관에 들어갔다. 다음 날 친구는 그를 주택가로 데리고 갔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했다. 그 뒤로 친구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는 용주골 미군기지촌의 포주집(파주읍 연풍리 278-45)에 내동댕이쳐졌다. 포주에게 집에 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겁에 질려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옆방의 아가씨가 차비를 쥐어주면서 도망치라고 했다. 다음날 도망치다가 포주가 고용한 깡패에게 붙잡혀 골방에 갇혀 죽도록 맞았다.

저녁이 되자 영업을 나가라고 했다. 포주는 안 아프게 하는 약이라며 알약을 세 개 주었다. 이렇게 매일 포주가 주는 알약을 먹어야 했다. 약물에 중독된 이후에야 그 약이 ‘세코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세코날과 술에 취해 매일 밤낮 미군과의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포주는 약물의 양을 점점 늘렸고, 그는 그렇게 약물에 중독돼 포주의 노예가 되었다. 그는 다시 도망칠 궁리했다. 1966년 1월 포주집을 빠져나와 길 건너 태양다방(파주읍 연풍리 294-51) 옆에 있는 방범초소로 내달렸다.

당시 방범초소에는 경찰 3명과 방범대원 2명이 근무했다. 경찰에게 살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30대 중반의 곱슬머리 경찰은 “남에게 빚을 졌으면 갚아야 된다. 이렇게 도망쳤다가 경찰에 잡히면 유치장에 가야 한다.”라며 오히려 그를 협박하며 포주에게 연락했다.

그날 그는 골방에 갇혀 죽도록 맞았다. 경찰은 포주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용주골을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용주골 포주집뿐만 아니라 미군부대 막사에까지 들어가 성매매를 했다. 포주가 시키는 대로 미군부대 정문 앞에 서 있으면 미군부대 내 매니저가 나와 위안부들을 부대 안 클럽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당시 미성년자여서 검진증이 없었는데 포주가 나와 비슷한 다른 위안부 도민증을 이용했다.

그는 용주골에 있는 동안 동산의원(파주읍 연풍리 278-14)에서 일 주일에 한 번씩 강제로 성병진료를 받았다. 임신을 하면 포주가 강제로 데리고 가 낙태수술을 받게 했다. 마취도 안 한 상태에서 17차례 낙태수술을 받았던 기억은 끔찍한 공포로 남았다.
애국교육도 있었다. 한국 정부와 미군부대는 한 달에 한 번씩 큰 클럽에 위안부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했다. 미군은 성병교육을 시키고, 파주시 공무원들은 미군에게 서비스를 잘 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가르쳤다.

그의 나이 19살 때인 1968년 봄. 그는 용주골에서 판문점 근처의 한 클럽으로 100만 원(한국은행 통계시스템 현재 2,600만 원)에 팔려갔다. 그 클럽에서 2년 동안 하루 다섯 번 정도 미군훈련장을 오르내리며 막사나 방공호 구덩이에서 20여 명의 미군에게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그리고 21살 되던 해 여름, 문산 포주는 그가 있었던 용주골 포주에게 그를 다시 팔아 넘겼다. 그렇게 수십 년간 기지촌을 돌았다. 이렇게 미군과 포주의 성노예로 살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왜 한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그건 한국 정부와 미군부대가 한 편이 돼 위안부들을 동원하고 관리했기 때문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나중에 노후를 보장하겠다면서 걱정하지 말라는 관청 군수의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군수는 군청 땅을 마련해 그 땅에 2층 건물을 지어 1층은 가발공장을 하고 2층은 나이 든 위안부들이 살 수 있는 집으로 쓰겠다고 했다.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오로지 미군에 대한 서비스만 신경쓰라고 했다. 그 말은 거짓이었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위안부를 동원하고 이용한 것뿐이었다.

기지촌에서 정말 많은 위안부들이 죽었다. 그 죽음에 대해 위안부들은 미군과 포주에 의한 타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저히 살아서는 기지촌을 벗어날 수가 없어 비관하다가 손목을 칼로 긋거나 약을 먹고, 연탄가스를 마셔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는 이제 칠십을 앞두고 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병든 몸밖에 아무 것도 없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한국과 미국 정부는 위안부들이 조용히 있어 주길 바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너무나 억울하다 반드시 한국과 미국 정부로부터 사과와 보상을 받고 싶다.”
                                                                                               이용남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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